저는 현재 국무총리실 산하 국책연구원인 통일연구원에서 대외협력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대외협력팀에서는 국제 및 국내학술회의 조직 및 회의 개최, 외국기관 및 국내 산·학·연구기관과의 MOU체결, 기관 홍보 등의 업무를 수행한답니다.
저를 돌아본다면 이화여대 대학원 북한학협동과정에서 운영하고 있는 북한 정치, 북한경제, 북한사회·문화 및 사회주의체제이론, 북한인권, 개발협력 등의 다양한 커리큘럼을 통해 북한관련 전문가로 일할 수 있는 전문적 식견을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여, 북한관련 취업시장이 좁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관련 정부부처, 연구원, 기업체에서는 오히려 북한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우수한 젊은 인력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입니다.
사회에 먼저 진출한 선배로서 감히 이화여대 북한학협동과정 출신들에 대한 평가를 소개해 드린다면 ‘전문성과 현장감을 두루 겸비한 우수한 전문인력’이라고 평하고 있다고 전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회에 진출한 선배님들, 그리고 후배들의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평판이 졸업생들의 노력뿐만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우수한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도록 학위 이수과정 중에 강의뿐만 아니라 통일관련 유관기간(정부부처, 연구원, NGO 단체 등) 및 외국대학에서의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북한·통일 분야에서의 현장감을 익힐 수 있도록 지원해주시는 학교와 교수님들의 진심어린 지원과 네트워크에 힘입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북한이라는 블루오션에서 여러분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멋진 후배들을 속히 만나기를 기대하며 이글을 마칩니다.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은 일입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통일에 대한 ‘뜻’ 하나로 고민하던 시절, 여러 길을 돌아 북한학과를 찾게 되었습니다. 공부보다는 활동에 관심이 있었던 저였지만, 돌이켜보니 학교를 선택한 것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석사과정 2년은 공부다운 공부를 하기에는 턱없이 짧은 시간이고, 부끄럽게도 저는 공부에 몰두해본 적도 없지만, 그 2년간 생각의 단초를 찾고 살찌울 수 있었습니다.
요즘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지요. 북한과 관련한 ‘직업적 진로’는 더 좁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통일은 특별한 과제이기에, 북한학과 졸업생들에게는 스펙경쟁을 벗어나 ‘뜻이 길을 열어주는’ 흔치 않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전공을 살려 KBS 남북교류협력팀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정부에 들어와, ‘하고픈 일을 하며 먹고살기까지 하는’ 행운아가 된 것도 그 덕분입니다. 전망이 있을 것이라며 전략적으로 북한학과를 택한 직업예비군이 되기보다는, 통일에 관한 공부나 일을 정말 하고 싶은지 자신에게 묻는 것이 먼저입니다. 통일의 외피는 거대담론으로 몹시 무거워져 있지만, 실제 통일은 ‘생활’일 것이므로, 우리가 해야 할 소소하지만 귀중한 일들은 너무나 많고 그 모두가 우리에게 열린 ‘진로’이기 때문입니다.
2011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어느 날 아침, 자유로를 달리는 통근버스 안에서 TV 속 광고 한편이 떠올랐습니다. 훈장님이 제자들에게 그동안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며 성적표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한 제자에게는 참을성이 부족하다고 참을 ‘忍(인)’을, 또 다른 제자에게는 학문에 게으름이 많다고 부지런할 ‘勤(근)’을 적어 주었습니다.
배움을 시작한 이후부터 저는 ‘으뜸’ 평가를 받고 싶었습니다. 성적표 모든 항목에는 ‘秀(수)’가 쏟아지기를 바랐고, 1등이 1등급으로 이어져 으뜸 대학교 All ‘A’학점의 착한 학생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착한 학생이 곧 훌륭하고 의젓한 사회 어른이 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졸업이 다가왔고 대학원에서 학위를 받던 날, 제 두 손에는 ‘배려’라는 성적표가 있었습니다. ‘이 성적표의 의미는 무엇일까?’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성적의 의미를 헤아려보지 못한 채 사회라는 시험장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개성공단 일터에서 북쪽 친구 금선이, 혜경이와 친자매처럼 지나기까지 1년 남짓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서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콧대 높은 여대 출신’ 꼬리표를 떼어내는 데에 또 1년 남짓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착한 학생인 채로만 사회라는 공간에 나온 탓인가 봅니다. 제 성적표에 ‘배려’를 담아 주신 이유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회에는 너무나도 착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으뜸’ 평가도 중요 하지만 상대를 존중하고 양보하는 배려의 마음이 실력 있는 북한 전문가로서의 여러분을 더욱더 빛나게 할 것입니다.
대학원 시절의 연구경험과 북측을 이해하기 위한 훈련은 제가 일터로 자리 잡은 곳곳에서 커다란 자산이 되었습니다. 작은 사회이자, 작은 조직을 경험하는 기회 공간으로서 이화여대 북한학과는 따스하고 가족과 같은 울타리입니다. 좋은 가르침을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으시기에 실력을 두루 갖춘 여러분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서울-봉동을 연결한 철도 위 열차는 잠시 멈춰 있습니다. 다시 달리는 그 언젠가를 위해 여러분이 이화여대 북한학과에서 보내는 지금의 이 시간을 배움의 열기로 가득 채워 나가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십년 전입니다. 북한학과에 진학하면서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교환학생이 되어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북한을 공부하는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때때로 개성공단에 직접 출장을 나가 그곳의 사람들을 대하고 제2, 제3의 개성공단을 준비하는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꿈을 실현한 운 좋은 사람이죠. 그 길에는 제가 북한학과에서 배운 지식과 소중한 인연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부침이 많은 남북관계 속에서 졸업 후의 진로를 고민하거나 업무상 발생한 어려움으로 전전긍긍 할 때, 교수님과 동기․선후배들의 따뜻한 격려는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저는 북한학의 전문성과 특수성을 비단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더욱 필요로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십년 후. 우리 북한학과 식구들이 서울과 평양, 신의주와 나선 그리고 저 먼 량강도와 자강도까지 당당히 누비는 모습을 새롭게 꿈꾸어 봅니다.
개신교 NGO연합단체인 성서한국에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사무국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성서한국은 <사회적책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이라는 주제로 29개 개신교 NGO들이 연대하는 연합단체입니다. 대표적인 단체들로 한반도평화연구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 좋은교사운동, 기독법률가회(CLF), 한국누가회(CMF), 성토모, 개척자들 등이 있습니다. 2007년 <통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답>이라는 주제로 전국 대학생 캠프를 진행한 이후 이론과 학문적 체계를 갖추기 위해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사)평화한국에서 사무국장으로 있으면서 <평화와 통일아카데미> 사업을 주관하였습니다. 현재는 2012년 총선과 대선과정에서 통일관련정책에 대한 매니페스토운동을 염두에 두고 "희망정치시민연합"이라고 하는 유권자운동단체에서 <매니페스토 2012> 프로젝트 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연구분야는 통일과정에서 개신교의 역할에 관한 것이고 인권운동에 주된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이화여대 대학원 북한학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쳐 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며, 현재 한화그룹경제연구원에서 북한 분야를 담당하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석사과정 중에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연구조교로 일하였고, 석사 졸업 후에는 삼성경제연구소 경제안보팀(舊 북한경제팀)에서 6년간 근무하면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우리 과를 졸업한 많은 선후배들이 국회, 공기업, 정부부처, 언론사, 연구소 등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저는 그 중에서도 연구기관에서만 계속 일을 해왔습니다.
이화여대 대학원 북한학과의 석·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교수님들께 배웠던 많은 지식과 경험들이 연구업무를 하는 데에 절대적인 밑거름이 되고 있으며, 이 점에 대해 늘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북한학과에는 최고의 교수님들이 계시고, 북한학을 전공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각종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북한학과에서 지적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키면서 북한전문가, 통일전문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가시길 바랍니다.
저는 나이 50이 넘어 이화여대 북한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박사과정을 수료한 늦깎이 탈북자 학생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이화여대가 유명한 대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로 부르주아 상류층의 여성들이 다니는 대학으로, 여성들이 귀족적인 가정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덕목을 배워주는 대학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남한에 와서 본 이화여대는 여성들이 가정이 아니라 당당하게 사회에서 자기의 위치를 찾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다니는 대학이었습니다. 이화여대생들은 여성인 제가 보기에 너무 멋있었습니다.
그러한 이화여대에 북한학과가 개설되어 있다는 것이 저에게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이 늦은 나이에, 이화여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비록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지식, 마음 등 어느 면으로 보나 결코 어리다고 볼 수 없는 훌륭한 원우들과 함께 내가 태어나고 자라 난 곳, 반생의 애증이 얽혀 있는 북한을 분석해보고 논의해본다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이화여대 북한학과는 참 따뜻한 곳이었습니다. 원우들의 정, 교수님들의 관심과 배려로 끈끈하게 얽혀진, 그래서 자본주의의 세련됨보다는 원초적인 인간냄새가 더 짙은, 어딘가 모르게 <북한>스러운 학과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탈북자인 저를 많이 도와주고 배려해준 고마운 교수님들과 원우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대학원 과정을 통해 북한에서 배웠던, 의심조차 해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는 방법이 옳지 않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가장 큰 성과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학원에 다니며 남한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좋은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습니다. 이화여대 대학원 북한학과를 다닌 덕에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북한관련 글을 쓰고, 연구도 하고, 시민단체일도 하고 있습니다.
대학원기간 더 많은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이 개인적으로 아쉽고 교수님들께 미안합니다. 열심히 박사논문을 쓰는 것으로 보충하려고 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수출입은행 북한개발연구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박지연입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심심할까. 왜 아무것도 나를 흥분되게 만들지 못하는가. 제가 스무살에 하던 고민입니다. 얼마 전, 어느 회의의 개회사에서 은행장님께서 “동북아, 북한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나는 가슴이 뜁니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요즘 저도 동북아, 북한이라는 단어에 종종 가슴이 뜁니다.
가슴이 뛰는 그 무언가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20대 초반 시절, 평범하고 심심한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그러다 스물넷이 되었고,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모르는 한국, 그리고 한반도 이야기에 흥분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면서 나 또한 가슴이 뛴다는 것.
한국으로 돌아와 이대 북한학과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그리고 살아가게 될 세상에서 내가 그 누군가를 흥분시킬 수 있는 비교우위는 북한 그리고 한반도에 관한 경험과 연구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타인에게 주목받는 짜릿함을 위해 공부했습니다. 아주 열심히.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떻게 하면 북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분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로 제 고민이 바뀌었습니다. 학위를 받고 졸업을 할 때 즈음엔 누가 나를 보지 않아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북한을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이대 북한학과를 졸업한 덕분에 한국수출입은행이라는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남북협력기금 수탁관리기관인 수출입은행에서는 최근 북한을 포함한 동북아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장기적인 차원의 통일준비에 매진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판에 제가 서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또 가슴이 뜁니다.
장황하게 이야기 했지만, 아직도 헤매고 있는 선배인 제가 후배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딱 한가지입니다. 가슴이 뛰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북한이야 말로, 우리의 가슴을 그리고 세계인의 가슴을 뛰게 할 아주 흥미로운 공부거리라는 것입니다. 이화여대 북한학과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슴이 뛰는 그 무엇인가를 꼭 얻어 가십시오. 제가 그랬던 것처럼.